채소가게와 클래식

잠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. 되도록 늦게 들어가려 했다. 옮긴 숙소엔 창문이 딱 손바닥만하게 나 있기 때문이다.
숙소 바로 앞에서 우측으로 꺾어 대부분 가게가 문닫은 시장으로 들어섰다.
한 가게가 아직 환했다. 온갖 채소들이 상자와 선반에 즐비하게 놓여있었다.
 기타와 피아노가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처럼 느린 선율로 흘러나왔다. 처음 듣는 곡이지만 아늑했다. 전에도 클래식 음악이 들리던 가게였다. 그 때 음악에 몸을 실어 천천히 흐느적거리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.

 
그 뒷모습의 주인은 야채상자처럼 쪼그리고 앉아 식사 중이었다.
이제 새 그림은 시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(힘들어서..) 뭐에 홀린듯 또 가게 앞에 의자를 펼쳤다. 동시에 녹음기를 꺼내 모든 소리를 주웠다.

긴 호흡의 곡이 끝나자 차분한 목소리들이 대화를 이어갔다. 클래식 라디오였다. 
종이 위 연필선은 연해졌다. 
그림 그리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. 느린 박동의 음이 그동안의 여정을 정리해주는 것 같았다.
어느덧 가게는 문닫을 시간이 되어 주인은 바닥을 쓸고 야채상자들을 거두기 시작했다. 그림을 다 못 마치고 일어섰다.

어제와 비슷한 시간대가 되길 기다렸다. 주인은 분홍 대야에 녹빛 풀을 물에 담궈 헹구고 있었다. 곧 샐러리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.
야심차게 아저씨까지 그려넣어 서둘러 완성했는데 최상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.
스스로 타박하며 새 종이로 넘어갔다. 전 장과 다르다. 빠른 템포로 일렁이듯.
이번 타이페이 작업은 계속 단계를 넘어간다. 끝인줄 알았던 지점에서 새로 난 길로 접어든다.






주인은 야채들 뒤에 숨어있다. 잘 보면 하얀 정수리를 찾을 수 있다.


자리를 정리하고 주인에게 첫번째 그림을 내밀었다.
나는 두번째 그림을 가지면 되니 당신께서 이거 가지란 손짓을 허우적허우적.
아저씨는 의아해했으나 곧 이해해주었다. 그는 가만히 그림을 보았다.
나는 가만히 그를 보았다. 멈춘듯한 옆모습의 감정이 어렴풋하게 읽혔다.


잘 모르겠지만 이 곳에 다시 올 수도 있다.
오늘은 길었던 한 길의 끄트머리, 마지막 밤이다. 보름달이 환하게 떴다.












덧글

댓글 입력 영역